사전 원고가 증거물이 됐다 —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10월 1일
우리말 사전을 만들던 학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혔다. 판결은 광복 이틀 전에 확정됐고, 증거물로 압수된 원고는 해방 뒤 서울역 창고에서 나왔다.
핵심사전은 한 언어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 원고가 증거물이 되었다.
먹고사는 일이 급했다. 개인의 성공이 유일한 목표였던 시절이 길었고, 그 시절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제는 다른 것을 할 여력이 생겼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빚을 졌다. 그들이 목숨을 걸어 얻으려던 것은 제 가족의 안전이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후손의 나라였다. 그 후손이 지금 우리다.
빚진 마음은 감정으로만 남으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표현되어야 하고, 표현은 기록이어야 한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적는 일이 우리가 건넬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인사다.
사람에게도 조직에도 나라에도 격이 있어야 하고, 멋이 있어야 한다. 개인의 성공을 넘어 그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 격은 구호로 오르지 않는다. 기억하는 방식으로 오른다.
"친일파"라는 뭉뚱그린 말 대신 이름·한자·당시 직책·받은 대가를 적는다.
모든 글 끝에 참고 자료를 남긴다. 확인되지 않은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쓴다.
판 사람의 이름만 남기면 절반의 기록이다. 저항한 이름도 함께 적는다.
우리말 사전을 만들던 학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혔다. 판결은 광복 이틀 전에 확정됐고, 증거물로 압수된 원고는 해방 뒤 서울역 창고에서 나왔다.
핵심사전은 한 언어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 원고가 증거물이 되었다.
나라를 세우고 세 번째로 만든 법이 친일 청산이었다. 680여 명을 조사해 일곱 명이 형을 받았고, 법은 2년 5개월 만에 폐지됐다.
핵심실패한 시도와 시도조차 없었던 것은 다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때 아무도 하려 하지 않았다'고 적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은, 이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언문은 9월 15일에 나왔고, 사람들이 모여 식을 치른 것은 9월 17일이었다. 그리고 그 군대가 제 명령으로 움직이기까지는 4년이 더 걸렸다.
핵심창설은 하루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이름을 얻는 데 이틀, 제 손으로 움직이는 데 4년이 걸렸다.
나라가 넘어간 것은 8월 22일, 사람들이 그것을 안 것은 8월 29일이다. 그 사이 여드레는 빈 시간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게 관리된 시간이었다.
핵심아무도 모르는 조약은 종이일 뿐이고, 사람들이 알고 나서야 통치가 시작된다. 일제가 여드레를 쓴 것은 그것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이다.
1936년 8월, 두 신문이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웠다. 먼저 지운 것은 조선중앙일보였고, 그 신문은 이듬해 폐간되어 사라졌다. 오늘 우리가 이 일을 부르는 이름에는 사라진 쪽이 없다.
핵심살아남은 신문은 자기 지면에 자기 역사를 계속 적을 수 있었고, 사라진 신문에는 그럴 지면이 없었다.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쪽이 기억을 갖는다.
친일인명사전 4,389명에 안상호는 없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식 입장문을 내고 그 이유를 밝혔다. '보류'였다. 무죄가 아니라 자료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는 뜻이다.
핵심명단의 빈칸은 두 가지 이유로 생긴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거나, 거기까지 손이 닿지 않았거나. 둘은 완전히 다른데 겉으로는 똑같이 비어 있다.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조인되고 일주일 뒤에야 공포됐다. 그 사이 76명이 일본식 작위를 받았고 3,645명이 은사금을 받았다. 작위는 명예가 아니라 거래의 영수증이었고, 영수증은 남았다.
핵심이완용과 박제순은 을사오적이자 경술국적이다. 반대로 1905년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했던 한규설은 1910년 남작 작위도 거부했다. 한 번의 선택은 우연일 수 있어도 두 번은 아니다.
한 배우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광복절을 앞두고 뜻하지 않은 질문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살지 않고도 그 시대의 선택을 판결할 자격이 있습니까.
핵심그의 증조부는 친일인명사전 4,389명에도, 국가 공인 1,006명에도 없습니다. 누가 알았고 몰랐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겠지만, 알 수 없게 놔둔 책임은 우리의 몫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다섯 사람의 찬성으로 넘어갔다. 그날 그 방에 있었던 이름과 직책, 그들이 받은 작위, 그리고 죽음으로 답한 이름들을 함께 기록한다.
핵심다섯 명 전원이 친일인명사전(4,389명)과 국가 공인 명단(1,006명)에 모두 올랐다. 그러나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징역형 이상을 받은 친일파는 전국을 통틀어 10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