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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nium
1905.11.17을사늑약순국선열의 날

이름을 적는다 — 을사오적, 1905년 11월 17일

2026.08.1612 분 분량

핵심다섯 명 전원이 친일인명사전(4,389명)과 국가 공인 명단(1,006명)에 모두 올랐다. 그러나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징역형 이상을 받은 친일파는 전국을 통틀어 10명뿐이었다.

1905년 11월 17일, 중명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그해 여름에 이미 판을 다 깔아두었다.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양해를, 8월 제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의 승인을, 9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의 후퇴를 받아냈다. 대한제국의 편에 서 줄 나라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들어왔다. 11월 15일 고종을 알현해 조약안을 들이밀었으나 고종은 확답을 피했다. 이틀 뒤인 11월 17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대신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다. 회의장 바깥은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지휘하는 일본군 병력이 둘러싸고 있었다.

고종은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이토는 대신들을 한 사람씩 붙들고 가부(可否)를 물었다. 끝까지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은 별실로 끌려나갔다. 이토는 남은 답을 세어 "다수가 찬성했다"고 선언했고, 그 자리에서 외부대신 박제순의 이름으로 도장이 찍혔다. 문서에 적힌 날짜는 11월 17일이지만, 서명이 실제로 끝난 것은 18일 새벽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왜 '조약'이 아니라 '늑약'인가

이 문서에는 조약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 황제의 비준이 없다. 고종은 끝내 재가하지 않았고 국새도 찍히지 않았다.
  • 제목조차 없다. 체결 당시 이 문서에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었다. 『고종실록』은 '한일협상조약'으로, 11월 20일자 『황성신문』은 '오건조약(五件條約)'으로, 11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 호외는 '한일신조약'으로 적었다. '을사보호조약', '제2차 한일협약' 같은 이름은 모두 나중에 붙은 것이다.
  • 강박이 있었다. 군대가 궁을 에워싼 상태에서, 반대한 대신은 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1963년 유엔 국제법위원회는 국가대표 개인에 대한 강박으로 무효가 된 조약의 사례로 세 건을 들었다. 1773년 러시아군이 폴란드 의회를 포위하고 맺은 분할조약, 1915년 미군이 아이티를 포위하고 맺은 보호조약, 그리고 1905년의 이 문서다. 앞서 1935년 하버드 조약법 연구초안도 이 문서를 강박에 의한 무효 사례로 분류했다. 이 1963년 보고서를 찾아내 알린 사람은 일본인 변호사 도츠카 에쓰로였다.

조약(條約)이 아니라 늑약(勒約), 곧 억지로 맺게 한 약속이라 부르는 이유다. 다만 이 말의 내력도 적어둔다. '늑약'은 체결 직후부터 대한제국의 관료와 지식인들이 그 불법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말이지, 학계가 합의한 용어는 아니다. 이 블로그가 그 말을 쓰는 것은 학술적 판정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적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에 가깝다.

다만,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 조약에 대한 연구는 주로 불법성과 무효성에 집중되어 왔다. 1990년대 후반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 지면을 통해 이 논의가 일본에 소개되면서 양국 학자 사이에 불법이냐 합법이냐를 두고 긴 논쟁이 벌어졌다. 이태진이 엮은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2001)와 운노 후쿠주의 『한국 병합사 연구』(2008)가 양쪽의 대표적인 정리다.

결과는 어땠나. 모리 마유코는 『한국병합』(2024)에서, 국제법 이론과 사료에 대한 엄밀한 분석에 기반한 양국 학자들의 연구가 불법·합법의 문제에서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2010년 한일 지식인들이 공동성명으로 원천 무효를 확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학계의 결론이 아니라 지식인들의 선언이었다.

더 근본적인 지적도 있다. 송지예는 2026년 논문에서, 제국주의적 질서 속에서 형성된 당시의 국제법을 기준으로 이 조약의 불법성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일본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역설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짚었다. 힘으로 식민지를 나눠 갖던 시대의 법으로 따져 이겨봐야, 그 법 자체를 정당한 잣대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무효냐 아니냐를 판정하지 않는다. 판정할 자격도 없다. 다만 그날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어느 쪽에 섰는지는, 판정과 무관하게 남는다.

이름과 직책 — 을사오적

그날 찬성한 다섯 사람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이름과 직책, 그리고 그 대가로 받은 것이다.

이름당시 직책생몰그 뒤
박제순
朴齊純
외부대신1858~1916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1910년에는 내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에도 참여했다. 자작(子爵).
이지용
李址鎔
내부대신1870~1928고종의 조카뻘 왕족. 1904년 한일의정서에도 서명했다. 백작(伯爵).
이근택
李根澤
군부대신1865~1919조약 직후 자택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다. 자작(子爵).
이완용
李完用
학부대신1858~19261907년 정미7조약,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체결했다. 후작(侯爵).
권중현
權重顯
농상공부대신1854~19341906년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자작(子爵).

다섯 사람은 1910년 병합 뒤 모두 조선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 또는 부의장 자리에 앉았다. 다섯 명 전원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고,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명단에도 모두 올랐다.

그 자리에 있었으나 오적에 들지 않은 이름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하다 끌려나갔다.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했다. 궁내부대신 이재극도 그 자리에 있었으나 가부를 묻는 대상은 아니었다.

다만 반대가 곧 그 사람의 생애 전체는 아니다. 민영기는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를 거쳐 병합 뒤 남작이 됐고, 이하영은 자작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두 사람 모두 2007년 국가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랐다. 그날 반대했다는 사실과 그 뒤에 한 일은 각각 따로 적어야 한다.

기록은 편하게 나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정확히 적어야 한다.

그해 겨울, 죽음으로 답한 이름들

오적의 이름만 남기면 절반의 기록이다.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렸다. 이 날에 목 놓아 크게 우노라. 신문은 정간되고 장지연은 투옥되었다. 다만 장지연 자신도 훗날의 행적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한 사람의 생애가 한 장면으로 요약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기록이 알려주는 사실이다.

11월 30일,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경고 대한 이천만 동포」는 죽어서도 저승에서 동포를 돕겠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같은 날 전 의정부 의정 조병세가 뒤를 따랐고, 홍만식·이상철·김봉학이, 12월 30일에는 유생 송병선이 자결했다. 앞서 그해 5월에는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이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기록해야 할 이름은 두 종류다. 판 사람의 이름과, 팔리지 않으려 죽은 사람의 이름.

이름을 적는 일 — 친일인명사전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세 권짜리 사전을 냈다. 수록 인원 4,389명. 일제강점기의 공문서·신문·잡지 등 3,000여 종의 사료를 뒤져 250만 건의 인물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쌓은 결과였다. 수록 기준의 시작점이 바로 을사늑약 무렵이다. 이 글이 다루는 1905년 11월이 사전의 첫 페이지인 셈이다.

사전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하나의 기록이다. 2003년 12월, 국회는 편찬 기초자료 조사 예산 5억 원을 전액 삭감했다. 이듬해 초 시민들이 인터넷 모금을 시작했고, 열흘 만에 목표액 5억 원이 모였다. 성금은 그 뒤로도 이어져 7억 원을 넘겼다.

국가도 따로 기록을 남겼다. 2005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1,006명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하고, 25권 2만 1,000여 쪽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펴냈다. 민간의 사전과 달리 국가가 공인한 명단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처벌은 남지 않고, 기록만 남았다

해방 뒤 대한민국은 처벌을 시도했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꾸려졌다. 결과는 이렇다.

단계인원
반민특위가 처리한 대상 (1949.8.31 공소시효 만료까지)688명
기소293명
판결까지 간 사람78명
징역형 이상을 받은 사람10명
1951년 2월 반민법 폐지 후 남은 수감자0명

1949년 6월 6일 새벽, 경찰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킨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위원회는 그해 10월 완전히 해체됐다. 처벌하지 못한 자리에 남은 것이 기록이다. 기록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친일인명사전, 지금 어디서 볼 수 있나

2026년 8월 기준으로 확인한 접근 경로다.

경로범위비용·조건
친일인명사전 앱 (민족문제연구소, iOS/안드로이드)4,389명 전체. 통합검색(이름·분야·출생연도·출신지), 가나다순·분야별 찾아보기유료 앱. 공식 디지털판이며 사실상 유일한 전문(全文) 검색 수단
웹 무료 검색 DB없음.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는 앱 안내만 제공하며, 웹에서 인명을 검색하는 공개 데이터베이스는 운영하지 않는다
위키백과 —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수록자 4,389명 명단(분야별 분할)무료. 사전의 해설·근거 사료는 없고 이름 위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국가 공인 1,006명)명단 및 조사 내용무료. 명단은 위키백과·뉴스타파 데이터포털에서 열람·다운로드 가능. 보고서 원문은 국가기록원 소장분에 사본 신청
종이책전 3권 전문구매 또는 도서관 열람

정리하면 전문을 무료로 검색할 수 있는 공식 웹서비스는 없다. 이름만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위키백과 명단과 국가 공인 1,006명 명단으로 충분하고, 개별 인물의 행적과 근거 사료까지 보려면 유료 앱이나 종이책이 필요하다.

덧붙임 — 이 슬로건에 대하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흔히 단재 신채호의 말로 인용되지만, 그의 저작에서 이 문장 그대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채 널리 쓰이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섹션이 이 문장을 내거는 이유는 문장의 출처가 아니라 문장이 요구하는 태도 때문이다. 정확하게 적고, 틀리면 고치고, 불편해도 남긴다. 첫 글에서부터 슬로건의 출처를 의심해 두는 것이, 이 기록을 시작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 2026년 8월 17일 두 차례 고쳤다. (1) 학술 문헌을 확인해 '왜 조약이 아니라 늑약인가' 절을 보강했다 — 무효론만 싣고 반론과 학계의 현황을 적지 않았던 것을 바로잡았다. (2) 민영기·이하영이 을사늑약에 반대한 뒤 작위를 받고 국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사실을 빠뜨렸던 것을 추가했다.

을사늑약을사오적친일인명사전대한제국1905
※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다면 근거와 함께 알려주시면 확인 후 본문을 수정하고 수정 사실을 남깁니다.
이 글이 속한 사건 · 1905.11.17 을사늑약

이 사건에 붙은 기록은 아직 이 글 하나다.

남기는 말

사람을 향한 욕설과 위협은 지웁니다. 후손을 조상의 행위로 비난하는 글도 지웁니다(연좌제 금지). 사실에 대한 반박은 근거와 함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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