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2일, 통감 관저
일주일 전인 8월 16일,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통감 관저로 불러 조약 초안을 보여주었다. 협상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문안은 이미 도쿄에서 다 짜여 있었다.
8월 22일, 서울 거리에는 열다섯 간마다 일본 헌병이 배치됐다. 그 상태에서 순종 앞에 형식뿐인 어전회의가 열렸고, 이완용은 전권을 위임받았다. 같은 날 오후 통감 관저에서 이완용과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조약이 조인됐다. 여덟 개 조항짜리 문서였고, 제1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5년 전 을사늑약이 외교권을 가져갔다면, 이 문서는 나머지 전부를 가져갔다.
왜 일주일을 숨겼나
조인은 8월 22일에 끝났지만, 공포는 8월 29일이었다. 그 여드레 동안 일제는 신문을 통제하고 정치 집회를 금지했으며 원로대신들을 사실상 연금했다. 반발이 조직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계산이었다.
8월 29일, 이완용은 시종원경 윤덕영을 시켜 황제의 어새를 찍게 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소멸했다. 우리가 '경술국치'라 부르는 날은 조약이 맺어진 날이 아니라 그것이 발표된 날이다. 나라가 넘어간 것과 그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 사이에, 계획된 일주일이 있었다.
순종의 서명이 없다
을사늑약에 고종의 비준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첫 글에서 했다. 5년 뒤 문서에도 같은 결함이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8월 29일 공포된 황제 칙유에는 두 가지가 빠져 있거나 잘못돼 있다. 하나는 1907년 11월 이후 순종이 조칙에 반드시 써 온 서명 '척(坧)'이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찍힌 도장이 국새가 아니라 칙명지보(勅命之寶)라는 것이다. 칙명지보는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때 일본이 가져간 행정 결재용 옥새다. 국가 간 조약에 찍힐 물건이 아니다.
순종은 전권위임장에는 서명했지만, 마지막 비준 절차에 해당하는 칙유 서명은 끝내 거부했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다. 2010년 강제병합 100년에 한일 양국 지식인 1,000여 명이 서울과 도쿄에서 이 조약의 원천 무효를 공동 선언한 근거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다만 이것은 학계의 유력한 주장이지 모든 쟁점이 종결된 사안은 아니다. 반론도 분명하다.
일본 법학자 다수는 병합조약이 을사늑약과 다르다고 본다. 을사늑약에는 전권위임장도 비준도 없었지만, 병합조약에는 전권위임장과 조약문과 칙유가 형식상 갖춰져 있고 순종이 전권위임장에는 서명하고 국새를 찍었다는 것이다. 강박으로 맺어진 조약을 무효로 보는 규정은 1969년 비엔나 조약법협약의 것이어서 1910년에 소급 적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 논쟁은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 지면에서 3년간 이어졌고, 그 기록이 이태진이 엮은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2001)로 묶였다. 반대편의 정리는 운노 후쿠주(海野福壽)의 『한국병합사 연구』(2008)다. 어느 쪽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2010년의 공동성명 역시 학계의 합의가 아니라 지식인들의 선언이었다.
경술국적 — 여덟 개의 이름
조약에 찬성하고 서명한 대신들을 경술국적(庚戌國賊)이라 부른다.
| 이름 | 당시 직책 | 받은 작위 |
|---|---|---|
| 이완용 李完用 | 내각총리대신 | 백작 → 후작 |
| 박제순 朴齊純 | 내부대신 | 자작 |
| 윤덕영 尹德榮 | 시종원경 | 자작 |
| 민병석 閔丙奭 | 궁내부대신 | 자작 |
| 고영희 高永喜 | 탁지부대신 | 자작 |
| 조중응 趙重應 | 농상공부대신 | 자작 |
| 이병무 李秉武 |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 자작 |
| 조민희 趙民熙 | 승녕부총관 | 자작 |
이 표에서 두 이름을 다시 본다. 이완용과 박제순. 두 사람은 1905년 을사오적이었고 1910년 경술국적이었다. 5년 사이에 한 사람은 학부대신에서 내각총리대신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은 외부대신에서 내부대신이 됐다. 나라를 판 대가로 지위가 올라갔다는 뜻이다.
작위는 훈장이 아니라 영수증이다
조약이 공포된 바로 그날,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이 함께 공포됐다. 병합에 공을 세운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작위를 주는 법이었다.
| 구분 | 인원 |
|---|---|
| 후작 | 6명 |
| 백작 | 3명 |
| 자작 | 22명 |
| 남작 | 45명 |
| 합계 | 76명 |
이것은 1910년 당시의 숫자다. 이후 1924년에 이항구가 더해지고, 작위를 물려받은 습작자 81명이 나오면서 조선귀족은 모두 158명이 된다. 작위는 한 세대로 끝나지 않았다.
돈도 따라왔다. 귀족과 공로자, 구한국 정부 관리를 포함해 3,645명에게 은사금이 지급됐고, 총액은 679만 원이었다. 당시 화폐 가치로 한 사람의 인생을 여러 번 살 수 있는 돈이 최상위 수령자들에게 갔다.
여기서 백과사전에는 잘 나오지 않는 대목이 있다. 은사금을 받은 귀족 가운데 상당수가 1920년대에 몰락했다. 은사공채의 가치가 떨어졌고, 소비는 컸고, 사업 투자는 실패했다. 노동을 천시하는 교육을 받고 특권으로 이권을 좇던 사람들이었다.
그러자 일제는 조선귀족회와 창복회를 만들어 이들을 구제했다. 덕분에 조선귀족은 경제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가는 한 번 지급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 관리되는 관계였다.
이 명단이 왜 중요한가. 작위 수여는 기록으로 남는 행정 행위이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증언은 엇갈릴 수 있지만, 누가 어떤 작위를 언제 받았는지는 문서에 남는다. 훗날 대한민국이 친일반민족행위를 법으로 규정할 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는 작위를 받거나 물려받은 행위 그 자체를 친일반민족행위로 못박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조항에 따라 귀족 분야에서만 139명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작위는 명예의 표시가 아니었다. 거래가 있었다는 영수증이었다. 그리고 영수증은 남는다.
거부한 여덟 명
76명 중 여덟 명이 작위를 거부하거나 반납했다.
김석진 · 윤용구 · 홍순형 · 한규설 · 민영달 · 조경호 · 조정구 · 유길준
이 명단에서도 한 이름을 다시 본다. 한규설. 1905년 11월 17일 참정대신으로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하다 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갔던 사람이다. 5년 뒤 그는 남작 작위를 거부했다. 첫 번째 거절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김석진은 남작 작위가 내려오자 1910년 9월 8일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위를 거부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틀 뒤인 9월 10일, 전남 구례에서 매천 황현이 아편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며칠에 걸쳐 절명시와 유서를 썼다. 그중 한 구절이 오래 남았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를 회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그가 죽기 직전까지 쓰던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를 비판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나라가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마지막까지 기록을 하고 있었다.
두 개의 명단, 하나의 원칙
1905년 11월 17일에 다섯 개의 이름이 있었고, 1910년 8월 22일에 여덟 개의 이름이 있었다. 겹치는 이름이 둘이다. 그리고 두 번 다 거절한 이름이 하나 있다.
기록은 이런 것을 보여준다. 한 번의 선택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은 아니다. 그래서 날짜와 이름과 직책을 정확히 적어두는 일이 필요하다. 나중에 겹쳐 보기 위해서다.
일주일 뒤인 8월 29일, 경술국치의 날을 다시 적겠다. 나라가 사라진 날이 아니라, 사라진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 날의 기록이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병합조약
- 위키문헌 — 한일병합조약 원문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일제의 한국 병합
- 위키백과 — 조선귀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석진
- 경향신문 — 매천 황현 절명시
- SBS — 황제 서명 없는 조서, 한일병합 원천 무효 논쟁
- 이용창,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수작 경위와 수작자 행태 — 對韓政策의 순응과 代價」,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331~371쪽
- 박희경, 「귀족 구제대책으로 본 「조선귀족」의 실태」, 『일본근대학연구』 67, 한국일본근대학회, 2020, 223~238쪽
- 이태진 편,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 태학사, 2001 — 일본 『세카이(世界)』 지면 3년 논쟁의 기록
- 海野福壽(운노 후쿠주), 『한국병합사 연구』, 2008 — 무효론에 대한 반론 측 정리
이 사건에 붙은 기록은 아직 이 글 하나다.
남기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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