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달력
1905년 을사늑약부터 오늘까지, 근현대사의 날짜를 달력에 얹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의 기록을 올린다.
날짜는 모두 양력 기준이다. ★ 표시는 그 사건을 기려 지정된 법정기념일·국경일이다.
분류
주권과 목숨을 빼앗아 간 날. 식민 지배와 해방 후 국가폭력을 함께 놓는다
맞선 날, 그리고 죽은 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같은 계보다
쿠데타와 부정선거로 권력을 쥔 날
청산하려 한 날과 실패한 날. 반민특위에서 5·18 특별법까지
1월
5을사늑약에 맞서 의병을 일으킨 뒤 대마도로 끌려가 단식 끝에 순국했다.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한인애국단의 첫 거사.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1,000여 명의 포위 속에 사흘간 총격전을 벌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졌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6월 항쟁에 불을 붙였다.
독살설이 퍼지며 민심이 들끓었고, 국장일에 맞춰 3·1운동이 준비되었다.
2월
5도쿄 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3·1운동의 도화선.
국군이 공비 협력 혐의로 주민 700여 명을 집단 학살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노인과 아이였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제했다. 시행일을 일본의 건국기념일에 맞췄다.
「반민족행위처벌법 등 폐지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며 친일 청산의 법적 근거가 사라졌다.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졌다. 담배를 끊고 반지를 팔아 나라 빚 1,300만 원을 갚자는 운동.
3월
4전국 200만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마산의 항의 시위가 4·19로 번진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공포. 국가가 친일 조사에 나선 법적 출발점.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미완의 유고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4월
77년간 이어진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 수만 명이 희생됐다. 국가의 공식 사과까지 55년이 걸렸다.
대법원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8명을 처형했다.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렀다. 2007년 재심에서 전원 무죄.
상하이에서 임시헌장을 선포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가 이날 정해졌다.
일본군이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 3·1운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학생과 시민이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일주일 뒤 이승만이 하야한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났다. 이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왕 생일 행사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살상했다.
5월
5주영 서리공사로서 기울어진 외교 상황에 항의하며 런던에서 스스로 생을 마쳤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이후 18년간의 통치가 시작된다.
신군부의 계엄 확대에 맞서 광주 시민이 봉기했다. 열흘간의 항쟁을 공수부대가 진압했다.
새벽 계엄군이 도청을 진압했다. 끝까지 남은 시민군은 죽을 것을 알면서 남았다.
대통령 소속 국가기구가 출범했다. 4년 뒤 1,006명을 국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한다.
6월
10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의 굴욕적 조건에 반대해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계엄령으로 진압됐다.
경찰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시켰다. 친일 청산이 무너진 결정적 장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일본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거둔 첫 대규모 승리.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 사진이 이튿날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순종의 국장일에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운동.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이어진다.
전국에서 100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19일 만에 직선제 개헌을 받아냈다.
국교를 정상화하며 청구권 3억 달러를 받았다. 개인의 배상 청구권이 봉인되며 오늘의 강제징용·위안부 문제가 여기서 시작된다.
3년간의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다. 전쟁은 친일 청산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반민특위 습격 20일 뒤,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가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살해됐다.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시민이 이긴 날이자, 신군부가 정권을 연장한 날이기도 하다.
7월
6전쟁 발발 직후 정부가 보도연맹원을 집단 학살했다. 최소 수만 명으로 추정된다.
발행 전 날짜 재확인 필요 — [서술] 지역마다 시점이 달라 특정 날짜가 없다. 1950년 6월 말~7월로 서술할 것.
대통령 직속 기구로 출범했다. 4년간 친일반민족행위자 168명의 토지 2,359필지, 시가 2,373억 원을 국가 귀속시키고 2010년 7월 조사를 마쳐 그해 10월 해산했다. 애초에 4년 한시기구로 설계된 조직이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으나 회의장 입장조차 거부당했다.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정치인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에 맞았다. 해방 정국의 중도 노선이 무너졌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켰다.
행정권까지 일본에 넘어갔다.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이 배치되는 차관정치가 시작됐다.
8월
11군대가 해산되자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으로 번졌다.
한 방송 발언에서 시작된 논란으로 1916년 대정친목회 평의원 안상호의 행적이 다시 드러났다. 친일인명사전 4,389명에 그의 이름은 없다. 명단이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고, 후손조차 몰랐다는 뜻이다.
발행 전 날짜 재확인 필요 — [서술] 진행 중인 사안. 기록 대상은 안상호(1872~1927)와 명단의 불완전성이지 후손이 아니다. 연좌제 금지(헌법 제13조 제3항)·생존자 명예훼손 리스크를 고려해 후손은 사실관계에 필요한 최소한만 언급할 것.
중앙정보부가 도쿄의 호텔에서 야당 지도자를 납치해 수장하려 했다.
조선어 민간지가 강제 폐간되며 우리말 언론이 사라졌다.
폐업에 항의하던 여성 노동자들을 신민당사에서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경숙이 숨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처음으로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증언했다. 이 날이 국가기념일이 됐다.
35년 만의 해방. 그러나 친일 청산은 이날부터 시작되어 4년 만에 좌초한다. 3년 뒤 같은 날 정부가 수립된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동아일보가 실었다.
병합조약이 공포되며 대한제국이 소멸했다. 체결 일주일 뒤였다.
이날까지 처리된 대상 688명, 기소 293명, 징역형 이상은 단 10명이었다.
9월
4'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 속에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됐다.
예순다섯의 노인이 남대문역에서 신임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정규군이 창설됐다.
제헌국회가 친일 청산을 법으로 못 박았다. 2년 5개월 뒤 폐지된다.
10월
8우리말 사전을 만들던 학자들을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했다. 이극로·최현배 등 33명이 붙잡혔다.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맞선 항쟁이 일어났다. 열흘 뒤 유신은 총소리와 함께 끝난다.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고쳐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게 됐다.
제주 4·3 진압 출동을 거부한 군인들의 봉기와 그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이 대거 희생됐다.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가 6일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뒀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을사늑약을 강요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궁정동에서 대통령을 쏘았다. 안중근 의거와 같은 날짜다.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1965년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11월
7광주에서 시작해 전국 194개 학교 5만여 명이 참여한 학생 운동.
민족문제연구소가 4,389명을 수록한 세 권짜리 사전을 냈다. 국회가 삭감한 예산은 시민 모금으로 메웠다.
김원봉이 만주 지린에서 조직했다. 이후 20년간 일제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를 이어간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물둘의 재단사가 몸에 불을 붙였다.
외교권을 빼앗겼다. 찬성한 다섯 대신이 을사오적이다. 이 날이 순국선열의 날이 된 이유다.
장지연의 논설이 황성신문에 실렸다. 신문은 정간되고 장지연은 투옥됐다.
「경고 대한 이천만 동포」를 남기고 자결했다. 같은 날 조병세가 뒤를 따랐다.
12월
10항일운동부터 해방 이후의 국가폭력까지 조사하는 기구가 출범했다.
12·12와 5·18의 책임자가 구속됐다. 1997년 무기징역이 확정되지만 그해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개정 친일재산귀속법이 시행되며 2010년 해산된 조사위원회가 16년 만에 부활한다. 후손이 이미 처분한 재산의 매각 대금까지 환수 대상에 넣었고, 은닉 재산 제보자 포상금을 신설했다. 법무부는 최소 325억 원 환수를 예상한다. 반민특위 이래 청산이 다시 열린 드문 사례다.
발행 전 날짜 재확인 필요 — 환수 예상액 325억 원은 법무부 추정치이며 산출 근거는 공개되지 않았다 — 단정 서술 금지. 시행일은 다수 보도가 2026-12-03(공포 2026-06-02 + 6개월 경과). 법제처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진주만 공격 사흘 뒤, 임시정부가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전두환·노태우의 하나회가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며 군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광주로 이어진다.
공소시효를 정지시켜 신군부를 법정에 세울 길을 열었다. 반민특위가 실패한 자리에서 46년 만에 성공한 청산.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이완용은 살아남아 이듬해 병합조약에 서명한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다.
친일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는 법. 이듬해 출범한 조사위원회가 4년간 2,373억 원을 환수했고, 2026년 개정으로 16년 만에 위원회가 다시 열린다.
을사늑약 파기를 상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독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