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넘어간 것은 8월 22일이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안 것은 8월 29일이었다.
그 사이 여드레가 이 기록의 주제다.
여드레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약에 도장을 찍은 것이 8월 22일 오후다. 문서는 완성됐고 효력만 남았다. 그런데 일제는 발표하지 않았다.
그 여드레 동안 총독부가 한 일은 발표 준비가 아니라 반발 차단이었다. 신문을 통제했고, 정치 집회를 금지했고, 원로대신들을 사실상 연금했다. 소식이 퍼졌을 때 그것을 조직할 사람이 거리에 없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여드레는 계산된 시간이다. 나라를 넘기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넘어간 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8월 29일
그날 순종의 이름으로 칙유가 반포됐다. 이완용이 시종원경 윤덕영을 시켜 어새를 찍게 했다.
이 문서에 대해서는 앞선 기록에 적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찍힌 도장은 국새가 아니라 행정 결재용 칙명지보였고, 순종이 1907년 이후 조칙에 반드시 써 온 서명 '척(坧)'이 없다. 이것이 조약 무효론의 근거이고, 동시에 학계가 아직 합의하지 못한 지점이기도 하다.
같은 날 조선총독부가 설치됐다. 마지막 통감이었던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됐다.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은 그날로 없어졌고, 조선이라는 지명만 남았다.
알게 된 사람들
소식이 퍼진 뒤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날짜로 남아 있다.
| 날짜 | 일 |
|---|---|
| 9월 8일 | 김석진이 독약을 마셨다. 남작 작위가 내려온 직후였다. 작위를 거부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택했다. |
| 9월 10일 | 황현이 전남 구례에서 아편을 마셨다. 며칠에 걸쳐 절명시와 유서를 썼다. |
황현의 절명시 한 구절이 오래 남았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를 회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발표로부터 열흘 안팎이다. 여드레를 들여 만든 침묵이 깨지자마자 벌어진 일이다.
왜 '국치'인가
이날의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다. 일제는 한일병합이라 불렀다. 지금 우리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부른다. 경술년의 나라 잃은 부끄러움이라는 뜻이다.
부끄러움이라는 말이 오래 걸린다. 침략당한 쪽이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물음이 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이 기록은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이름을 지은 사람들이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남 탓만으로는 다음이 없다고 여긴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일 것이다.
여드레가 말하는 것
이 기록이 8월 22일이 아니라 8월 29일을 따로 적는 이유가 있다.
나라는 22일에 넘어갔지만, 그것이 사실이 된 것은 29일이다. 아무도 모르는 조약은 종이일 뿐이고, 사람들이 알고 나서야 통치가 시작된다. 일제가 여드레를 쓴 것은 그 사실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이다. 지배는 문서가 아니라 승인 위에 선다.
그래서 그 여드레는 빈 시간이 아니다. 알려지지 않게 관리된 시간이다. 무엇을 언제 알리느냐가 통치의 일부라는 것을, 이 나라는 시작하는 날부터 배웠다.
기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누가 무엇을 언제 알았고 언제 몰랐는지까지 적어두지 않으면, 남는 것은 조약문 한 장뿐이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일병합조약
- 위키문헌 — 한일병합조약 원문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일제의 한국 병합
- 경향신문 — 매천 황현 절명시
- 이태진 편,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 태학사, 2001 / 海野福壽, 『한국 병합사 연구』, 2008 — 무효론과 그 반론
이 사건에 붙은 기록은 아직 이 글 하나다.
남기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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